2012년 05월 04일
연민...
지어낸 이야기 (2010.10.31)
영어공부 한답시고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는데 이런 말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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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he intimate revelation of young men, or at least the terms in which they express them, are usually plagiaristic and marred by obvious suppressions.
사람들의 호소에서 표절의 냄새를 읽을 때가 있고 그 호소가 어딘지 검열을 했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나를 돌아보면 이는 명백하다. 이렇게 거짓된 측면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진정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호소에서 이야기를 지어낸다. 나는 자기 이야기밖에 못하지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자기 이야기뿐이지만 그 이야기하기가 또 쉽지 않다는 것에 내 어려움이 있었다. 내 이야기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표절의 냄새가 고약하게 나고 억압될 때가 있는데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이야기들을 잘할 수 있는지. 말을 잘 한다는 게 싫어질 때가 있는데 나는 말을 잘하는 것도 힘들었고 잘들어주는 것도 힘들었다. 지어낸 자기 이야기들을 믿으면서도 의심했다.
그 사람이 자기이야기를 하며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말들을 전혀 안하지 않는데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영원히 불충분한 사랑에서 연유한다. 충분한 자기애와. 롤랑바르트의 글을 쪼가리한 것에서 보았다. 아래는 그것의 인용이다.
“그 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우리가 그를 느낄 때--쇼펜하우어가 연민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더 정확히 말해 고통 속에서의 결합, 고통의 일치라 할 수 있는 것--우리는 그가 자신을 염오하면(파스칼처럼) 우리 또한 그를 염오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 환각에 시달리거나 미칠까봐 두려워한다면, 나 또한 환각해야 하고 미치광이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사랑의 힘이 어떠하든가에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끔찍한 일이기에 나 또한 동요하며 괴로워하나, 동시에 냉담하며 젖어들지 않는다. 나의 동일화는 불충분한 것이다. 나는 어머니이긴 하지만(그가 내게 걱정거리를 준다.), 불충분한 어머니이다. 내가 실제로 그를 보살필 수 있는 것에 비해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진정으로 그 사람의 불행에 동일시하는 그 순간에, 나는 그 불행에서, 그것이 나와는 상관없이 일어났으며, 이렇듯 스스로 불행해진 그는 나를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읽기 때문이다. 나와는 무관한 이유로 해서 그 사람이 그토록 괴로워한다면 그건 내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고통이 내 밖에서 성립하는 한, 그것은 나를 취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하여 하나의 역전이 내도한다. 그 사람이 나를 제쳐두고 괴로워하는데, 왜 내가 그 대신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불행이 나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하는데, 왜 나는 그를 붙잡을 수도, 그와 일치될 수도 없으면서 그의 뒤를 숨가쁘게 쫓아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 타자의 죽음 뒤에 홀로 살아 남는 그 순간부터 모든 주체의 입에서 나오는 저 억압된 말, 살자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압박하지도 내 정신을 잃지도 않으면서 그와 더불어 괴로워하리라. 아주 다정하면서도 잘 감시된, 애정에 넘쳐흐르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는 이 처신에, 우리는 부드러움이란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연민의 “건전한”(개화된, 예술적인)행위이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문학과지성사, 1991,pp. 83-85)
# by | 2012/05/04 01:42 | Sentimental | 트랙백 | 덧글(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