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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나의 스무 살. 그 때는 변화의 바람, 아니 보다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변화의 태풍이 불었다. 예보도 많이 들었고 예상도 했던 스무 살의 태풍이었지만 그 새로움과 변화라는 것은 썩 좋은 방향이 아니라고 해도 짜릿한 것이었다. 얼마나 짜릿했던지 나는 결국 남게 될 태풍 피해에는 아랑곳않고 심지어 내 몸까지 하늘로 날릴 것 같은 바람에 신기해하며 태풍이 더 강력하게 불기를 바라는 초딩의 심정으로 스무 살의 태풍을 만끽했다.

  이러한 태풍을 만끽하고파 하는 심정은 이미 앞 문장에서 약간 암시가 되었겠지만 스무 살 때 처음 느낀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열살 때 나는 강력한 태풍을 만끽하고 심지어 날아갈 뻔한 어린이였다. 우리 지역의 태풍에 공중파 뉴스는 우리 지역을 주목했고, 그 전에 없던 스포트라이트는 심지어 내가 우리 지역을 자랑스럽게 느끼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나는 고양되어 하늘을 날 것 같았고, 실제로 태풍이 나를 고양시키기도 했다. 태풍상태에서 우산을 펴고 점프를 하면 태풍은 나를 더 높이 올라가게 했다. 태풍이 나를 날게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고 나의 날개였던 우산은 부러지고 살이 뒤집히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매우 울상이 되었고 태풍의 무서움도 '몸소' 알게 되었다.

  내가 스무 살에 맞이했던 변화의 태풍 역시 무서운 것이었는데 사실 나는 잘 몰랐다. 무섭다는 것, 결국 내가 들어선 이 세계가 세계의 끝이 아니라 세계의 시작이라는 무서운 사실도 나는 잘 몰랐다. 지금 이렇게 남들보다 더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도 그 과거의 잘 몰랐던 무서운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무서움을 전혀 몰랐다면 이제는 너무 무서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무서움이 무섭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이 부끄러움이 무섭기도 하다. 부끄러움이 무섭다는 것도 무섭다. 이것이야말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무섭다는 사실을 말하는 내가 가장 무섭고 가장 의심이 간다.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지 내가 너무 잘 살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래서 너무 무서울 때, 삶에 매달릴 때는 차라리 무서움을 모르던 때가 더 편하고 좋았었지 싶다. 아무 것도 모르던 때 태풍에 날아가고 싶어 했던 약간은 그로데스크했던 순수의 시절이 말이다.

by 말려봐 | 2010/05/26 02:19

옛 가을의 빛

옛 가을의 빛   _허수경


개들은 불안한 고독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쫓아다녔다
저수지에 고인 물의 살 속으로 깊이 침입하던 바람은
수초를 기슭으로 자꾸 보냈고
하여 저수지 기슭에는 붉은 물풀들이 행려거지처럼 누워 있었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에서 빛은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가지가 마르던 마당에 보랏빛으로 고여들던 어둠은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 연기 속으로 들어가 해맑은 죽음의 빛으로 살아났다

병아리가 종종거리는
맨드라미가 붉은 손을 자꾸 흔드는
그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던 새댁의 눈 안에 고인 눈물 빛

벙어리 소녀는 낡은 거울 앞에서
낡은 결혼예복을 입어보았다
결혼예복 속에는 원앙 두 마리가 낡은 금빛 자수에 안겨 있었다
날아가는 빛을 보면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소녀가 수음을 했다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묵직한 우울함이 우물에 가라앉은 빛이 될 때

먼 산 숲에 핀 버섯이 가만가만 공기 속으로 돋아났고
흙은 아렸다

얼마나 무료한 나날들이 빛 속에 있는가
그날 죽을 것 같은 무료함이 우리를 살게 했지, 아주 어린 짐승의 눈빛 같은 나날이었다.

(in 문학동네 2009 겨울)

by 말려봐 | 2010/04/25 16:24 | 트랙백 | 덧글(1)

서늘

  서늘한 냄새를 맡고 싶어서 나는 더 음습한 서가로 파고들었다. 그 서늘하고 음습한 서가에서 나를 엄습했던 것은 점점 오래된 인간이 되어간다는 느낌이었다. 오래된 서가로 들어갔다는 것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체념에 들어간다는 것이었고 오래된 인간이 되어감을 의미했다. 나는 오래된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이제 내 사랑이 하찮고 보잘 것 없음을 깨닫고 체념할 수 있을 것 같다. '보잘 것 없다는 그러한 사랑의 초라한 진실'이 만들어내는 서늘한 그늘 아래 나는 들어갔고, 당분간은 이 곳에 안주해야 겠다. 안주라는 말이 안좋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데, 자기방어를 하자면, 안주는 술먹을 때만 필요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나같이 불안하고 붕뜬 사람에게는 한시적으로 필요하고 좋은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당분간은 서늘하고 그늘진 그 곳에서 축축하게 지내야겠다. 

by 딸깍발이 | 2009/06/27 00:15 | Sentimental | 트랙백 | 덧글(1)

머리가 맑지 않다

머리가 맑지 않다
수면시간은 적지 않은데, 카페인 섭취가 많아서인지
깊은 잠을 못자는 것 같다
차라리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 꿈을 잘 기억하는지.

꿈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하루 두 잔으로 줄인 커피를, 더 줄여야 할 것 같다.
 

by 딸깍발이 | 2008/08/12 20:33 | Sentimental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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